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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12] [Before] 낭시와 아르누보

[Before] 낭시와 아르누보

[Travel/France]

난 이번주 목요일날(휴일임) 뮌헨을 출발하여 낭시로 향한다. ^-^ 낭시에서 1박, 디종에서 2박한 후 일요일날 뮌헨으로 돌아오는 일정.
여행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은 정말정말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것 뿐. 여행책자를 가지고 여행을 가면, 영어로 된 자세한 안내판이나 오디오 가이드가 없는 이상 여행책자의 내용만 건져오는 것 같더라. ㅡㅡ;;
독일은 저스트고, 디키해외여행, 핵심 유럽 등등 여행지를 가져와서 이것저것 뒤져가면서 봐서 좀 나았지만.. 프랑스는 전혀 자료가 없다! >_<;;; 거기다가 낭시나 디종 같은 도시는 잘 소개되어있는 책도 없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인터넷 사전조사를 ^-^ 지난주부터 했당. ㅎㅎㅎ

먼저 낭시와 아르누보.

낭시는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의 중심지다. 독일 접경의 ‘알자스로렌’, 바로 그 로렌이다. 이곳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보불전쟁·1870∼1871) 끝에 빼앗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되찾은 땅이다. 우리에게는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낭시는 로렌지방의 수도. 18세기엔 공작 프란시스 3세가 다스리는 영지였다. 공작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 왕(프란시스 1세)이 됐다. 프랑스 땅이었다가 졸지에 오스트리아 영토가 될 위기에 처한 낭시. 다급해진 프랑스왕 루이 15세는 로렌지방과 수도 낭시를 장인인 스타니슬라스에게 넘겨줬다.

어부지리로 낭시의 군주가 된 스타니슬라스. 당시로선 드물게 두 번이나 폴란드왕을 역임했으나 말년에는 돈도 없고 왕위도 내놓은 상태였다. 그가 낭시에 올 때는 인생의 황혼기였던 59세. 루이 15세는 늙은 장인이 얼마 못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30년이나 더 살았다. 89세 때 담뱃불이 옷에 떨어져 불이 붙는 어이없는 사고로 죽을 때까지.

비록 군사·정치 문제는 간여할 수 없는 힘없는 왕이었지만 현명한 군주였던 스타니슬라스는 낭시에 신도시와 광장, 새궁전을 만들었다. 11세기에 도시 모습을 갖춘 낭시는 18세기 무렵엔 인구가 증가, 신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위 루이 15세를 찬양한다며 만든 것이 바로 스타니슬라스 광장이다.

광장 건설에는 프랑스의 이름난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광장과 개선문을 설계한 건축가 에레는 베르사유를 설계한 망사르와 보프랑의 대를 잇는 건축가. 250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타니슬라스 광장은 이후 유럽 각국 광장의 모델이 됐다. 개선문의 화려한 조각품은 장 라무라는 아티스트가 조각했다. 규모는 파리의 개선문보다 작지만 승전보를 알리는 황금천사상, 승리의 신과 지혜의 여신상 장식은 더 화려하다. 원래 광장 한가운데에는 루이 15세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대혁명 때 성난 군중들이 동상을 끌어내렸다. 나중에 그 자리에 낭시를 부흥시키고, 광장을 만든 스타니슬라스 동상을 세웠다.

4각형 광장 모퉁이에는 화려한 분수대가 서있고, 황금으로 도금된 6개의 철문은 최근 새로 도금했다. 낭시에선 모든 길이 스타니슬라스로 통한다.

한때는 궁전이었다는 시청, 화재로 다시 지었다는 오페라하우스, 100년이 훨씬 넘는 레스토랑, 마리 앙트와네트가 묵었다는 그랑호텔, 아르누보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광장은 이렇게 잘 단장된 로코코양식의 고건축물로 빙 둘러싸여 있다. 토박이 슈테판은 “비록 파리의 콩코드광장처럼 크고 넓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라고 자랑했다. 네모 형태의 광장 주변을 장식한 18세기 건축물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로코코 형식의 이 건물들은 900만 유로(약 111억 원)를 들인 대대적인 보수공사 덕분에 깔끔하게 단장됐다. 광장 바닥도 새 돌로 단장됐고, ‘황금의 문’과 분수, 개선문은 화려하게 바뀌었다.

이 중 그랜드호텔은 결혼을 앞두고 루이 15세를 만나러 온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묵었던 곳이다. 19세기 말 낭시에서 꽃피운 아르누보 양식의 유리 공예는 이곳 미술관 ‘뮈제 드 보자르’에서 감상할 수 있다.

광장의 백미는 다섯 개의 문 중 하나인 ‘황금의 문’이다. 검은 쇠창살을 황금 빛깔로 장식한 문으로 광장 네 구석에 있다. 두 모서리를 장식한 분수도 빼어나며, 광장 가운데 화려한 조각 장식의 개선문은 크기는 작아도 파리 개선문 이상으로 아름답다.

해질녘 광장은 붐빈다. 노을에 물든 광장 위 네모진 하늘을 감상하려는 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든다. 십자로 광장 바닥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 그 빛을 받아 기하학적 패턴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밤의 광장.

낭시는 물론 다른 유적도 많다. 중세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옛거리, 크고 작은 성당, 빛바랜 대리석 건축물, 잘꾸며진 공원….

이방인의 눈에 파리나 로마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유럽의 고도는 대개 비슷비슷하다. 이런 도시의 매력은 낡은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역사와 화려한 문화에 있다. 낭시는 낭만적인 고도임엔 틀림없다.

로렌 박물관

낭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면, 16세기 귀족의 궁전이었다는 로렌 박물관(Mus e Lorraine)은 도시에 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그림과 사진, 유럽 여러 도시의 생성과 발전, 소멸 등에 관한 미술품 수백점이 소장돼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왜 이런 광장, 이런 문화유산이 없을까 기죽을 필요는 없다. 박물관을 나설 무렵, 이상한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광장에 바둑판처럼 구획이 그려져 있는 흑백사진. 1958년부터 1983년까지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스타니슬라스 광장의 모습이었다.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는 프랑스 사람들도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은 역시 현재 그것을 만들고 가꾸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유럽 어디를 가도 우리처럼 잘 가꾸고 보존된 광장은 없다.”(30대 낭시 토박이 스테판) 선조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가에 대한 자부다.

아르누보 지역

낭시는 19세기 말 최전위 예술이었던 ‘아르누보’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독일 접경 알자스로렌 지방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치른 보불전쟁에서 빼앗겼다가 1차세계대전 뒤에 되찾은 땅. 우리에겐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잘 모르고 있었다). 알자스로렌 지역이 대부분 독일령으로 넘어갔지만, 낭시만은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었다. 인근의 프랑스인들이 대거 낭시로 몰려들었다. 사업으로 돈을 번 부르주아와 아르누보 계열 예술가들이 많았다. 이들이 일거에 낭시로 몰려와 호화 주택을 지으면서 당시로선 최신 유행이었던 아르누보 건축물이 들어서게 됐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아르누보 건축물만 80여개가 넘는다. 고급 주택가인 소호 지역에는 지금도 100년 전에 지어진 이들 작품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루이 마조렐이 지은 한 주택은 낭시 정부가 사들여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있었다. 철과 나무, 대리석을 이렇게 저렇게 구부려 화려한 장식을 넣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많이 사용한 아르누보 건물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현대적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루이 마조렐, 에밀 갈레, 자크 그루베 등이 낭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아르누보 작가들.

박물관에는 아르누보 계열의 유리공예 작품들이 많다. 침대, 식탁, 옷장 등 아르누보 양식의 다양한 소품들을 모아 놓은 루이 마조렐 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로렌박물관을 비롯해 30만명이 사는 도시에 박물관이 5개나 된다. 부럽다.

스타니슬라스 광장 건축가 에마뉘엘 에레 드 코리니와 금 공예사 장 라무르는 대단히 개성적인 바로크 양식을 이끌어 냈다. 긴 쪽이 124m, 짧은 쪽이 106m인 스타니슬라 광장 주변을 멋진 발코니와 채광창이 달린 7채의 건물이 에워싸고 있다. 시청 안에는 라무르가 연철로 만든 걸작이 있다. 25m 길이의 계단을 장식한 난간에는 황금빛 문장, 머리글자, 기념 장식이 들어 있다. 스타니슬라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는 대부분 라무르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바르텔르미 기발의 조각 작품을 곁들인 바다의 신 넵투누스 분수와 여신 안피트리테 분수의 황금 테두리 장식이 돋보인다.

낭시파 미술관 스타니스라스 광장에 위치하며, 낭시파의 작품을 비롯하여 모네, 모딜리아니, 피카소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카리에르 광장 레슈친스키가 사위인 루이 15세를 위해 광장 북쪽에 세운 개선문을 빠져 나가면, 가늘고 긴 카리에르 광장으로 들어선다. 한쪽 끝에는 1760년에 에레가 지은 주 청사가 서 있고, 그 앞을 타원형 주랑이 감싸고 있다. 이 곳에 페피니에르 공원, 로렌 공의 궁전, 역사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mirabelle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의 식당, 점심 20유로 by 미쉐린가이드

알리앙스 광장 가장 단순하지만 광장 한가운데에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을 보여 주는 시플레 분수가 있다. 이는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 있는 ‘4대 강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

낭시와 아르누보

프랑스 낭시 19세기말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지

낭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어났던 아르누보 운동의 중심지이다. 아르누보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독일과의 분쟁을 짚어야 한다. 낭시가 주도인 로렌지방은 15세기부터 독일과 크고 작은 국경 분쟁을 벌였다. 혹시 교과서에 실렸던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을 기억하시는가? 어느날 갑자기 프랑스땅에서 독일땅으로 변해 마지막 수업을 받는 교실의 풍경을 그린 ‘마지막 수업’은 1870년부터 2년동안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소재로 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을 독일에 뺏겼고 1차대전 후 독일에 승리한 뒤 알사스 로렌 지방을 돌려받았다. 낭시는 다행히 독일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전쟁 후 난민피난처가 됐다.

난민 중에는 많은 기업가와 예술가들도 섞여 있었다. 풍부한 자본과 예술인들이 모여든 소도시. 이들이 일으킨 문화운동이 바로 ‘아르누보’다. 아르누보는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자는 것. 벨기에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가장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곳이 낭시다. 루이 마조렐, 에밀 갈레, 유진 발랭, 자크 그루베 등이 낭시에서 활동했다.

아르누보의 흔적은 스타니슬라스 광장의 미술관, 공작의 궁이었던 로렌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아르누보는 그림보다는 건축과 공예, 가구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현재 낭시에 남아 있는 아르누보 건축만 80여동. 도심투어에서는 철과 나무, 대리석 등 다양한 소재를 쓴 집들을 통해 아르누보를 엿볼 수 있다. 건축가 앙드레가 지은 기찻길 옆 튤립모양의 발코니가 있는 포니에 르포의 집은 최초의 아르누보 건축. 소흐지역의 루이 마조렐의 집은 낭시 지방정부가 사들여 관광코스로 개방하고 있다. 또 그가 만든 가구를 전시한 박물관은 유럽은 물론 일본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실용성은 없고 아름다움만 추구했던 아르누보 운동은 얼마 가지 못했다. 1차대전 이후엔 단순미를 강조한 아르데코가 일어났다.

아르누보 양식을 빛낸 거장들의 작품으로 꾸민 빌라-메종 벨 에포크

헥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가 디자인한 마호가니 문으로 현관을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게 장식했다. 입구 오른쪽 벽면에는 체코의 예술가 뮈샤(Mucha)가 1889년에 제작한 석판화가 걸려 있다. ‘갈레의 거실’(salon Gall?에는 식물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3면 창문이 있다. 중앙에는 에밀 갈레가 만든 유명한 잠자리 원탁이 자리 잡고 있다. 밝은 빛깔의 나무 의자는 조르주 드 푀르(Georges de Feure)가 조각한 것이다. 카펫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디자인한 것인데 이 집을 개조한 누리사가 밝은 색상으로 다시 제작했다.

20세기에 막 들어선 1901년. 유리 공예가 에밀 갈레가 만든 ‘에콜 드 낭시’(Ecole de Nancy)에 몇몇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아르누보’(Art Nouveau)라는 새로운 풍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에밀 갈레는 장인 정신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줄 아는 유리 공예가였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였던 장 프루베(Jean Prouv? 1901~1984)는 에콜 드 낭시에 관해 “아르누보 예술가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소용돌이 장식과 아라베스크 문양 그 이상으로, 예술과 산업을 연결시키려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장식 예술가라기보다는 건설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19세기 말 장식적인 예술로 아름답게 빛났던 파리의 ‘벨 에포크’(Belle ?poque) 시대와 유리 공예가 에밀 갈레의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동일시될 정도로 그의 화려한 예술성은 생활 곳곳에서 번성했다.

그의 작품들은 식물 모양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독특한 형태와 장식성으로 인해 유럽의 귀족들과 왕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세기 초 페리에 주에(Perrier Jou?t)라는 샴페인 제조사의 운영자인 앙리 갈리스(Henri Gallice)는 갈레에게 그해에 만드는 샴페인을 담을 용기 디자인을 부탁했다. 갈레는 4개의 병을 손수 장식했지만 공교롭게도 샴페인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병 디자인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런데 1960년, 우연한 기회에 술 저장고에 몇십 년간 보관되어 있던 이 샴페인 병들이 발견되었다. 현대적이고 단순한 스타일이 인기를 얻던 때라 장식성 강한 갈레의 화려한 작품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페리에 주에 사장이었던 미셸 뷔댕(Michel Budin)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하얀 아네모네 장식이 있는 샴페인 병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화려하고 우아한 샴페인 병은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러한 성공에 힘입은 뷔댕은 펠릭스 마르실라크(Felix Marcilhac)와 장 피에르 카마르(Jean Pierre Camard) 등의 예술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아르데코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리에 주에의 저택을 사람들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메종 벨 에포크’(Maison Belle ?poque) 저택이 박물관이기보다는 생활 공간으로 보여지기 원했던 미셸은 실내 장식가인 파트리스 누리사(Patrice Nourissat)에게 개조를 부탁했다. 누리사는 우선 아르누보 대가인 갈레, 랄리크, 기마르, 마조렐, 무샤,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만든 가구와 화병, 램프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는 너무 과해도, 너무 모자라도 문제라는 것을 잘 아는 그가 아르누보의 특색을 되살리면서 고상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

“패브릭과 카펫은 당시의 문양을 재현한 것을 택하고 전체적인 공간의 색상은 샴페인을 제조하는 주택답게 밝은 핑크와 산뜻한 피스타치오 컬러를 사용하여 생기 있는 분위기로 연출했습니다. 식당은 코르도바 가죽의 부피감과 부드러운 질감이 돋보이도록 심플한 곡선의 나무 몰딩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단순한 모방은 한 치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술가들도 개성이 결여된 모방은 절대 하지 않도록 노력했거든요.”
2층에는 파트리스 누리사가 ‘이 집에서 가장 창조적인 방’이라고 부르는 ‘기마르 방’이 있다. 다양한 색조의 핑크가 눈길을 끌고 풍부한 소재와 화려한 문양이 정열적이면서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다. 생명력과 자연의 활기, 호사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은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편안함과 안도감을 선사해준다. 스타일과 이해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는 몰라도 처음 이 집이 지어졌던 당시 발휘되었던 대담성과 재치와 상상력은 개조 작업에서도 변함없이 되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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