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테피나코텍에서 마주치기 전까지, 루벤스는 플랜더스의 개 (파트라슈~)에 등장하는, 꼬마 네로가 한번만이라도 보기를 열망하는 그림(교회 안에 천막으로 가로막혀서 돈을 내야만 천막이 열리는)을 그린 위대한 화가의 이름이었다. 사실 그게 실존 인물인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술관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사람은 뭐.. 그림 그리는 기계였나.. 남긴 작품이 엄청나게 많을 뿐더러 대부분 교회의 벽을 장식하는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들 뿐이다. 사실 의아하기도 했었다. 중세시대도 아니고... 16세기의 화가라면, 교회와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릴 수도 있는거지만 다른 그림들, 정물화나 풍경화 등,도 그릴수 있을텐데 이렇게까지 치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그에 대한 힌트를 여기에서 약간 얻을 수 있었다.
(이사람도 퍼온것 같긴하다만)
http://sumbolon.egloos.com/1914506
루벤스의 생애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던 중대한 투쟁과 겹쳐 있었다. 전통적인 역사에서, 특히 예술사에서 이 사건은 구교와 신교,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사이의 단순한 종교적 갈등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그 사건은 신흥 중간 계급,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와 구래의 특권 계급 사이의 투쟁, 종교의 깃발 아래 수행된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사이의 전투였다. 그 사건은 최종적으로 유럽과 나머지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최전선 가운데 하나가 네덜란드였고, 루벤스는 그곳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네덜란드는 애초에 국가도 아니었고, 당시에 유럽의 지배적 군사 열강으로 에스파냐에 근거를 두고 맹위를 떨치던 카톨릭 봉건주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방 영토에 불과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칼뱅주의의 중심지였다. 칼뱅파는 신교 중에서도 가장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분파였다.
1566년에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가 이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네덜란드의 남부에서는 이 반혁명의 진압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후에 벨기에가 된) 이 지역은 에스파냐의 지배를 계속 받았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혁명파가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 지역은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루벤스의 아버지는 안트베르펜의 법률가로 단호한 칼뱅주의자였다. 1568년에 그는 탄압을 피해 독일의 베스트팔렌으로 도주한다. 그곳에서 루벤스가 태어났다. 루벤스의 아버지는 1587년에 죽었다. 1589년에 루벤스와 그의 어머니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루벤스는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그것은 반혁명에 가담한다는 의미였다.
이 사건은 루벤스의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카톨릭 교회가 의식적으로 미술을 반종교개혁의 문화적 무기로 동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벤스는 만토바 공작의 궁정 화가로 이탈리아에 갔고, 거기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기의 대가들(, 그리고 반역자 카라밧죠)의 미술을 연구했다.
그는 수많은 제작 주문에 응해 어질어질하게 소용돌이치는 인물들로 거대한 캔버스를 채워넣으며 교회와 궁전의 벽을 장식했다. 렘브란트 및 할스와 같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가난 속에서 죽고, 카라밧죠가 도망 중에 사망했음에 반하여 루벤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유명한 화가라는 명성 속에서 죽었다.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의 왕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루벤스가 반혁명의 화가였다고 해서 그의 예술이 형편없어지거나 아무런 흥미꺼리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그는 엄청난 재능에 기술적 수완이 완벽했다. 그는 자신의 대의에 부합하는 가치들을 왕성하게 표현했다. 그가 속해 있던 교회와 종교의 권세와 영광을 말이다. 이와 함께 그의 작품은 (고전적 신화의 외피 아래서) 인간 성정의 감각적 즐거움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학이 분명하게도 그의 예술을 훼손했고 제한했다. 그의 작품은 숭고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할스와 렘브란트에게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민중의 삶과 통찰력, 공감, 연대 의식도 결여되어 있다.
풍경화 <헤트 스텐 Het Steen>이나 누드 초상화 <털옷을 걸친 헬레나 푸르망 Helene Fourment> 같은 위대한 작품들은 그의 생애 말년에 탄생했다. 그가 후원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린 작품들이다.
★ 李在嬉 옮김/sumbolon@hanmail.net
그러니까 칼뱅파였던 아빠에게 발끈해서 아빠가 죽자마자 엄마랑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이후에는 카톨릭의 입맛에 맞는 엄청난 양의 훌륭한 그림들을 그림으로써 이쁨받고 편안하게 살다 갔다.
루벤스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 화려함과 장엄함, 규모에 유혹되곤 하지만.. 방 몇개에 걸쳐서 계속 되는 비슷한 그림들에 나중에 가서는 좀 질려버리곤 한다. 어쩌면 루벤스가 살다간 삶과 닮았다는 느낌도 조금 ^^
위키피디아의 정보는 여기에...
http://en.wikipedia.org/wiki/Peter_Paul_Rubens
Peter Paul Rubens (June 28, 1577 – May 30, 1640)
루벤스는 17세기의 플랑드르 지방의 화가로, 교회의 반혁명주의에 앞장서서 교회의 그림들, 역사화, 초상화 등을 그렸으며, 주로 종교적/신화적 대상을 과장된 움직임과 화려한 색채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Antwerp에 독자적인 스튜디오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의 세력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어쩌면 이게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남게 된 이유일지도.. (돈많은 사람들이 collect해서 잘 보존해줬으니까..)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왕 필립 4세, 영국의 왕 챨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댄다.
1600/1608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티티안과 틴토레토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베니스, 피렌체를 거쳐 로마로 간다. 로마에서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의 그림을 공부하고 로자리의 마돈나를 여기서 그린다. 스페인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후 약 4년간 머물면서 많은양의 그림을 그린다. 또한 로마에서 Santa Maria in Vallicella 을 꾸미는데 참여한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다시 Antwerp로 돌아온 루벤스는 1609년부터 1621년까지는 Antwerp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작업한다. 1621년 프랑스의 여왕 마리아 드 메디치로부터 파리의 뤽상브르 궁전을 장식할 그녀와 그녀의 남편 헨리 4세의 일대기를 그려달라는 청을 받고 착수하나 완공되지 못한다. (프랑스가 그때 쫌.. ㅋㅋ) 이후에도 스페인과 영국의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쁘게 그림을 그려댔다. 1630년이 되어서야 Antwerp에 돌아와 말년을 보낸다. 53살먹은 할아버지 화가가 망측하게도 16살짜리 소녀와 결혼했다지; "모피"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Das Pelzchen, 1638 의 통통한 여자가 바로 이 16살짜리 와이프, Hélène Fourment 라고 한다. 이 그림이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있었음. 현제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ㅋㅋ

1635년에는 Antwerp 외곽의 Château de Steen (Het Steen)으로 이사해 자연경관을 그리거나 브뤼겔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네덜란드 일반인들의 모습을 그리는 등의 시도를 하다가 1640년 죽는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서 본 루벤스의 그림들..
Infante Isabella Clara Eugenia (1566-1633), 1615

Ildefonso-Altar um 1630/32


Beweinung Christi 1614

Vier Weltteile um 1615

Wunder des Hl. Ignatius von Loyola um 1617/18

